목사칼럼
반복해서 하는 기도
Sermons on Prayers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제6장 반복해서 하는 기도
1. 우리는 기도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반복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반복해서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은 이러한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 마태복음 6장과 26장을 보겠습니다. 먼저 6장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마6:7)
3.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7에서 헛된 반복을 금지하셨습니다. 헛된 반복은 이교도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들은 특정한 기도문을 열 번 외우는 것이 다섯 번 외우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기도문을 백 번 외우는 것이 오십 번 외우는 것보다 더 응답 받을 확률을 높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4.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단 한번이라도 헛된 말로 기도를 하면 그것은 헛된 기도라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헛된 말로 이백 번을 기도해도 그것은 여전히 헛된 기도일 뿐입니다.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헛된 말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동일한 기도 제목을 놓고 수백 번 기도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된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게 문제입니다.
5. 이제 마태복음 26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장면이 나오는 본문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 너머에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비로소 슬퍼하시며 몹시 괴로워하시더라.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멀리 가사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오사 그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도대체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느냐?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니라. 그분께서 다시 두 번째 나가사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오셔서 보시니 그들이 다시 자더라. 이는 그들의 눈이 무거웠기 때문이더라. 또 그분께서 그들을 떠나 다시 나가사 세 번째 같은 말씀들로 기도하시고”(마 26:36-44)
6.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기도를 같은 말로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헛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없습니다. 헛된 말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진심으로 하는 기도라면 하루에 같은 기도를 백 번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단 한번도 하지 마십시오. 반복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헛된 반복을 하는 게 문제입니다.
7. 만일 구원받지 않은 가족을 위해 그들이 구원받게 해 달라고 진심으로 하는 기도라면 십분 마다 한번씩 같은 내용을 기도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한 기도라면 하나님께 매달려 끊임없이 반복해서 구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는다면 몇 번을 반복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8.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하는 것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라면 말의 표현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 제발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도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면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9. 기도에 대한 본문 두 개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야고보서 5장과 열왕기상 18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도 자신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요청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낙담하거나 용기를 잃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10. 먼저 야고보서 5장을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약5:17) 엘리야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정(passions)”이라는 것은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feeling)”을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사르며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봤을 때는 마음이 한없이 담대해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벨로부터 자신을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두려워하며 도망쳤고 숨어서 차라리 죽기를 바랬습니다.
11. 엘리야의 감정은 그가 보는 것으로 인해 좌우되었습니다. 오바댜가 왕궁에 거하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에는 그를 책망했습니다. 엘리야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낙심하여 자살을 생각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12. 엘리야의 생애를 공부하면 대부분 갈멜산에서 바알의 대언자들과의 대결과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을 살펴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보다면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간절히 기도하니…”(약5:17) 성경은 우리와 같은 사람인 엘리야가 기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승리하는 장면을 보면 항상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가 낙심하고 실패할 때는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13. 엘리야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려 위대한 하나님을 위해 싸울 때에는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싸우지 않을 때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14. 시몬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선포했을 때 수천 명이 회심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소녀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오순절에 그는 다락방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셨고 그는 거리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위대한 일이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엘리야나 베드로는 모두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15. 잠시 골로새서 3장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느니라.”(골3:2-3)
16. 열정[1](passion)이란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애착(affection)이란 외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출장을 가서도 간음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애착이 아니라 열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이 애착이 아니라 단순한 열정이라면 언제든지 부정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17. 성경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애착을 두라는 것은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가 아내에게 애착을 둔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손잡고 있을 때와 동일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애착입니다.
18.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설교를 들을 때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맙니다. 열정의 대상이 하나님에서 스포츠와 TV 드라마로 옮겨가 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9.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예배 시간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삶을 통해 그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화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오전 11시나 동일합니다.
20. 모든 사람들은 열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같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가 응답 받는 것 같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병원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불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통사고를 당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전혀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21. 열정이 아닌 애착 위에 세운 가정이라야 지속 될 수 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애착(affection)입니다.
22. 저는 예전에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청년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여러 명의 형제들과 함께 있는데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최근에 구원받았으며 저의 설교 테이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는 영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앞으로 삼 년간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백만 명을 구원받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3. 저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주위의 환경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들이 목표했던 것을 이루지 못하면 이내 실망하고 열정이 모두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 있는 것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변합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변합니다. 그러한 것을 바라보면 우리의 마음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둬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에 애착을 둬야 우리의 마음도 견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4. 다시 야고보서 5장으로 돌아와서 엘리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 비가 오지 않기를 그가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였고 그가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자기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7-18)
25. 엘리야는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가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비가 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환란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대환난 때 엘리야가 돌아오면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26. 엘리야는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죽은 아이를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그가 말한 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겪고도 엘리야는 열정(passion)에 의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일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잘 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낙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교훈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가 열정이 아닌 위에 있는 것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27. 야고보서는 엘리야의 행적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열왕기상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왕은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많은 빗소리가 있나이다, 하니”(왕상18:41)
28.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구한다면 우리는 응답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가 비를 멈추어 달라고 기도하면 멈추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를 다시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까지는 비를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와 약속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9. 엘리야가 아합에게 한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고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서 비가 올것이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42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라, 하니 그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이르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일곱 번 다시 가라, 하니”(42-43절)
30. 우리는 엘리야의 삶을 통해 큰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엘리야가 기도하고 응답 받는 것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해서 아합에게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에 응답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31.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는 듯 했습니다. 엘리야는 아무것도 응답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비를 구했지만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만일 이때도 엘리야가 열정으로만 사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꿇었던 무릎을 다시 펴고 일어나 산을 내려와서 아합에게 사과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고 응답하지 않으셨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열정으로만 일했다면 거기서 모든 걸 멈췄을 것입니다.
32.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는데 왜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지 의아해 합니다. 왜 남편을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아내를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열정에만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면 곧 그만두고 말 것입니다.
33. 43절의 뒷부분을 주목해 보십시오. “일곱 번 다시 가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헛된 반복을 하라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기도가 효과적인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34. 엘리야의 종이 일곱 번째 가기 전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갔을 때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거듭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호소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었을 쯤에는 엘리야의 종은 이미 지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제는 아무리 기도해봐야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여섯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응답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35. 만일 엘리야가 눈에 보이는 것이나 느낌으로만 주님을 섬겼다면 여섯 번이나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시점에서 매우 낙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확신을 거의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번이나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그의 열정과 느낌과 감정을 모두 사라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늘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가 여섯 번이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서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그는 점점 느낌과 감정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하늘에 애착을 갖는 것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36.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물을 씨를 뿌려도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섯 번이나 눈물로 씨를 뿌렸지만 매번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섬김과 생활에서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했는데도 아무런 응답조차 없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없고 비도 없고 응답도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느낌이나 감정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의 애착을 하늘에 두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37. 엘리야는 주변 상황에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의 애착은 하늘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리라고 믿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으리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섯 번이나 응답 받지 못했지만 일곱 번째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애착은 구름이나 바람이나 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애착은 하나님께 있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38. 44절을 보겠습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이르되, 보소서,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올라가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왕의 병거를 준비하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39.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대언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아합의 생각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큰 비가 있으니 피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만일 그가 처음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을 때 계속 기도하는 것을 멈췄다면 아무런 비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합도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첫 번째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다고 해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라고 평가 받는 아합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40. 엘리야는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간증이 모두 자신의 기도에 달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계속 반복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합에게 간증을 잃었을 것입니다.
41. “그 동안에 구름과 바람으로 인해 하늘이 캄캄해지고 큰 비가 내리므로 아합이 병거를 타고 예스르엘로 갔는데”(45절) 왜 큰 비가 내렸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큰 비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큰 비가 내렸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믿고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을 것 같고 아무런 가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기 때문에 큰 비가 내린 것입니다. 엘리야는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거했습니다.
42. 동일한 기도를 일곱 번 반복한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하는 기도라면 응답이 없는 것 같다고 해서 기도를 그만두는 것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43.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계속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 충분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단지 기도하고 싶을 때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44. 성경은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맑고 구름 한 점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큰 비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큰 비가 올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45.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훈련이 된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전혀 낙담하지 않고 믿음을 갖고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46. 우리는 이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지를 나눠주었고 거리에서 설교를 했고 방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했지만 구원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변화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없이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47.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고 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열정으로만 사역을 했다면 우리는 진작에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나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나가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마음과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열정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머지 않아 지쳐 쓰러지고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 애착을 두어야만 주위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요동치 않고 주님을 섬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48. 우리에게 무엇을 필요한지 아십니까? 엘리야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비가 오든 오지 않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든 떨어지지 않든, 누가 방해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49. 우리가 느낌과 감정의 영역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느낌과 감정이 아닌 하늘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고 확신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 아시기 바랍니다.
50. 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을 여섯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 받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그것이 정말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라면 계속 기도하십시오. 일곱 번째에는 응답해 주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스무 번이나 했지만 응답 받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계속 기도하십시오. 스물 한번째는 응답해 주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51.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생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위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바로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52.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보다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 응답해 주시는 것보다 나중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열정의 끝은 낙심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애착을 두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안식합니다.
5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 분께 애착을 두는 것입니다. 모든 남편은 아내에게 애착을 두어야 하고 모든 아내는 남편에게 애착을 두어야 하며 모든 자녀들은 부모에게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1]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이 “성정”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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